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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On Paper >

갤러리신라 대구는 시대와 세대를 아우르는 예술가들의 작품을 통해, 매체로서의 종이가 지닌 예술적 잠재력을 탐구하는 전시《ON PAPER》를 개최합니다. 이번 전시는 회화의 지지체로 오랫동안 사용되어 온 ‘종이’가 갖는 물질적 특성과 개념적 유연성을 재조명하며, 단순한 바탕을 넘어 독립적이고 자율적인 예술 매체로서의 종이의 위상을 제시하고자 22명의 작가의 작품들을 소개합니다.

종이 위에 남겨진 작업은 예술의 기원에 가까운 곳에서 시작됩니다. 그것은 가장 개인적이며 동시에 가장 보편적인 예술적 행위의 결과이며, 작가의 손끝에서부터 종이 위로 옮겨진 선, 얼룩, 색은 단순한 표현을 넘어, 감정의 궤적과 사유의 흔적을 담아 내고 있습니다. 종이는 창작의 가장 직접적인 매개체이며, 따라서 그 위에 남겨진 자취들은 감정과 생각의 거의 원형적 형태에 가깝게 여겨집니다.

동시대 미술 속에서 종이 작업이 갖는 의의는 오히려 그 비영속성과 소박함에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우리는 거대하고 복잡한 이미지들과 끊임없이 연결되는 디지털 환경에 살고 있습니다. 이미지가 넘쳐나는 시대 속에서, 손으로 그린 선 하나, 종이의 질감이 주는 감각 하나는 그 자체로 저항이 됩니다. 종이 위의 작업들은 느림, 멈춤, 응시 라는 낱말을 다시 되새기게 하며, 기계화된 감각을 잠시 멈추고 인간적인 체험으로 되돌아가도록 이끕니다.

시간의 물성을 고스란히 드러내는 종이는 구겨지고, 접히고, 변색되고, 또한 찢어진 종이의 표면은 시간의 흐름과 기억의 흔적을 시각화하는 장치가 됩니다. 어떤 작업은 그 위에 쌓인 수많은 생각의 흔적들을 통해 사유의 층위를 드러내고, 어떤 작업은 종이라는 매체 자체를 해체하고 재조합 함으로써 새로운 조형적 실험을 시도하기도 합니다. 이처럼 종이 작업은 단지 ‘회화의 하위 범주’가 아니라, 하나의 독립적이고 실험적인 예술 장르로서의 가능성을 보여주는 장르입니다.

무엇보다도 우리에게 종이는 여전히 ‘가능성의 공간’입니다. 손쉽게 구할 수 있지만, 그만큼 무한한 상상과 접근을 허용하는 이 재료는 작가로 하여금 더 자유롭고 솔직한 표현을 가능하게 합니다. 이것은 기록이자 제안이며, 순간적인 것이자 지속적인 것입니다. 종이 위의 작업은 작가가 세계를 바라보는 방식의 가장 근원적인 증거이며, 우리가 예술과 다시 만나는 문턱이기도 합니다.

이번 전시는, 그런 종이의 존재 방식에 대한 하나의 응답입니다. 즉흥성과 실험, 흔적과 시간, 손의 감각과 생각의 운동이 뒤섞이는 장면 속에서, 종이 작업은 여전히 유효한 동시대 예술의 언어임을 관객에게, 작가에게 보여줄 것입니다.

본 전시에 출품된 작품들은 ’생각이 형상화되는 물질적 공간’으로서 종이의 역할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개념에서 전통, 비유에서 추상, 실험적 태도에 이르기까지 다양하고 깊이 있는 접근을 통해 종이 고유의 조형성과 감수성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아직도 종이는 수채화나 과슈 등 회화의 전통적인 바탕으로서 뿐 아니라, 오늘날 동시대미술에서도 여전히 주요한 장르로 기능하고 있습니다.

미술 애호가와 작가 여러분들의 많은 관람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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